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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코 민족의 위대한 작곡가 드보르자크

by 쿨베린 2024. 8. 9.

체코를 대표하는 음악가인 드보르자크는 민족의 민요와 음악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자신만의 색깔로 음악적 색채를 채워나갔었던 드보르자크의 삶과 음악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 음악가의 삶

 

드보르자크는 오스트리아제국 프라하 근교 마을인 넬라호제베스에서 태어났습니다. 당시에는 체코가 아니라 오스트리아령에 속해있었던 곳이지요. 아버지는 푸줏간 겸 여관을 운영했고 어머니는 성에서 일하는 집사의 딸이었습니다. 8명 중 장남으로 태어난 드보르자크는 가업을 이어가는 것을 당연한 시대에 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음악에 재능을 보였고 5세가 되던 때부터 바이올린 연주를 즐겨하게 됩니다. 6세가 되면서 초등학교 교육과 더불어 바이올린 연주법을 배우기 시작했지만 그의 욕구를 충족시키기에는 부족했습니다. 즐로니체 학교 근처에 살던 외삼촌 집으로 교육을 위해 보내지면서 본격적인 음악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즐노니체 학교의 리만선생님의 영향으로 비올라, 오르간, 피아노 등 악기 연주법과 작곡공부의 기초인 화성악도 배우기 시작하였고, 외삼촌과 리만선생님이 아버지를 설득하여 16세무렵 본격적인 음악가의 길에 한 발짝 내딛게 됩니다. 1857년 드보르자크는 프라하 오르간 학교에 입학을 위해 프라하로 이동을 합니다. 오스트리아 제국 수도인 빈에 비하면 중소도시였지만 당시 프라하는 보헤미아의 수도였기 때문에 이전 살던 곳보다는 아주 큰 도시였습니다. 프라하 오르간 학교는 교회 오르가니스트를 양성하는 곳으로 기본적인 화성법, 대위법, 푸가 등 폭넓은 음악 지식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외삼촌이 유학경비를 지원해 줬지만 넉넉한 형편이 아니었기에  한 푼이라도 벌기 위해 성체칠리아 오케스트라 비올라 연주자로 입단을 하였습니다. 거기서 만난 친구들의 도움으로 악기도 빌려 연주해 보고, 다양한 연주회 티켓도 얻어보며 공연들을 볼 기회 갖게 되었습니다. 2년 만에 오르간 학교를 차석으로 졸업하였지만 오르가니스트로 취직은 생각만큼 쉽지 않았으며, 이 시기 프라하 국립극장 오카스트라 모집에 합류하면서 10년간 비올라 연주자로 무대에 섰습니다. 

 

 

2. 연주자에서 작곡가로 변신

 

30세가 되던 해 드보르자크는 작곡가로 변신을 하게 됩니다. 12년 간 연주자로 살았지만 작곡에 대한 열망은 커져갔고 더 늦어지면 기회가 없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오케스트라를 사임하고 교회오르간 연주자 자리를 귀해 더 많은 시간을 작곡에 투여하게 됩니다. 그 후 1년 만에 체코의 문학가 비테슬라프 할레크의 시에 곡을 붙인 '백산의 후계자들'을 내놓으며 작곡가로서 대박을 터트리게 됩니다.  특히 오스트리아에서는 젊고 재능있는 예술가의 경제적 지원을 하는 정부장학생 정책을 시행하고 있었는데, 여기에 드보르자크가 교향곡 3번과 교향곡 4번을 포함한 15곡을 제출하면서 장학생에 선발이 되게 됩니다. 이 지원금을 바탕으로 드보르자크는 작곡에 더 매진할 수 있었고, 실내악곡에서 교향곡에 이르는 폭넓은 작품들을 만들 수 있었습니다. 1877년 4번째 국비 장학생에 선발되면서 또다시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하게 됩니다. 이 시기 브람스는 드보르작의 음악을 무척 맘에 들어했으며 악보를 출판하는데 다양한 도움을 주어 전 유럽에 드보르자크의 이름을 알리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브람스와의 우정을 바탕으로 늦은 나이에 성공을 하게 된 드보르자크는 끊임없이 작곡활동에 매진을 하게 됩니다.

 

 

3. 음악적 성공와 인생의 마침

 

드보르자크의 대표곡 '슬라브 무곡'은 특히 영국에서 인기가 높았고, 런던필하모닉 협회를 통한 초청공연을 성공하면서 경제적으로도 안정된 시간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독일 황제로부터 훈장을 수여받기도 하였으며 모교였던 프라하 오르간 학교와의 합병을 한 프라하 음악원의 교수직도 제안받았습니다. 이렇게 영광스러운 표창과 수상, 후학양성으로 바쁜 날들 속에서도 그는 특유의 근면 성실함으로 작곡을 계속하였고 1890년 종교음악의 정점이라 평가받는 '레퀴엠'을 완성하기도 했습니다. 특히 1892년 미국의 내셔널 음악원장으로 취임하면서 흑인학생과 마주하며 생활하던 그는 흑인영가(미국의 흑인이 노예시대에 부르기 시작한 종교적 민요)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탄생한 곡이 교향곡 9번 신세계로부터 입니다. 이렇게 미국에서 대 성공을 하였지만 그는 향수병으로 내셔널 음악원장 임기가 끝나기가 무섭게 고향인 프라하로 돌아왔습니다. 프라하에서 지속적인 작곡활동과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을 하다가 1904년 5월 뇌졸중으로 쓰러져 63세의 나이로 운명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