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바로크시대를 언급할 때 음악의 아버지 바흐와 음악의 어머니 헨델, 그리도 제일 많이 언급되는 음악가 비발디에 대해 알아보려합니다. 자라온 환경과 사제가 된 이유, 그리고 음악을 꾸준히 작업할 수 있었던 배경등을 알아봅시다.
1. 사제가 된 비발디
안토니오 루치오 비발디는 1678년 3월 이탈리아의 베네치아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 지오반니 바티스타, 어머니 카밀라 칼리키오는 사이에서 4남 5녀 중 둘째였습니다. 아버지는 이발사였지만 성당에서 바이올린 연주자로도 일하고 있었고, 어머니는 재단사의 딸이었습니다. 비발디가 태어나던 시대에는 아이가 태어나면 일주일 안에 세례를 받는 것이 관례였지만 안토니오는 너무 허약했습니다. 부모든 어떻게 하든 아이를 살리려고 했고 두 달 동안 건강을 회복한 뒤에야 정식으로 성당에 데려가 세례를 받았습니다. 아버지가 성당에서 바이올린 연주를 하고 있었기에 그의 삶은 성당과 밀접했습니다. 안토니아고 태어나 살던 17세기는 계급사회로, 신분을 상승하는 방법은 전쟁에 나가 공을 세우거나 사제로 서품을 받는 길이 유일했습니다. 따라서 아버지는 안토니오를 사제로 키워 집안을 일으키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 아버지 뜻에 따라 10세가 되던 해 성당의 후원금을 받아 성직자가 될 준비를 했습니다. 그리고 5년 후 삭발례를 받음으로 본격적인 성직자 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2. 음악을 즐기는 신부
15세에 삭발례를 받고 사제가 되기로 올레오 수도원에 들어간 비발디는 10년 만에 사제 서품을 받았습니다. 일반적으로 성직자가 되기 위해 수도원에서 거주하며 단절된 생활을 해야 하지만 몸이 약하다는 이유로 집에서 출퇴근하며 일을 할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음악가가 대부분인 아버지의 손님들이 자주 집에 찾아오면서 음악을 지속적으로 접할 수 있는 분위기에서 생활할 수 있었습니다. 아버지와 친구들이 여는 가족음악회도 즐겼고 가끔 아버지를 대신해서 성 마르코 성당에 바이올린 연주자로 서기도 했습니다. 25세의 비발디는 서품을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아 건강상의 이유로 집전이 힘들다고 호소했습니다. 사제로서 당연히 해야 할 미사에서 벗어나면서 음악 활동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피에타 병원에서 운영하는 음악원의 교사로 활동도 하며, 음악원 학생들을 가르치고 오케스트라를 이끌기도 했습니다. 이 무렵 비발디가 작곡한 열두 개의 트리오 소나타를 비롯한 소나타 곡들이 베네치아에서 출판되었고 유럽 전역으로 이름을 알리게 되었습니다.
3. 오페라에 빠진 비발디
18세기 초 이탈리아 특히 베니스에서 가장 인기 있던 장르는 오페라였습니다. 자연스럽게 비발디도 오페라 작곡에 관심을 갖고 음악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첫 번째 오페라 '이관의 오토 대제' 는 베네치아에서 초연을 했고 이후 매년 오페라를 작곡했던 비발디의 작품들은 유럽에 인기를 끌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비발디의 오페라는 완성되어 무대에 올려졌지만 우리는 비발디가 작곡한 오페라가 모두 몇 곡인지 알 수 없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유실된 작품이 많기 때문입니다. 음악사학자들은 그가 작곡한 곡이 50여 곡 정도라고 추축 했지만 최근 발견된 비바디가 쓴 편지지에서는 자신이 작곡한 오페라의 편수를 94편이라 했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비발디의 전성기도 끝이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사제인 비발디가 제자와 스캔들이 나면서 추기경은 1737년에 비발디에게 페라라에서 떠나라는 명령을 받게 됩니다. 결국 제작하던 오페라도 중단되고, 그동안 투자금도 회수할 수 없게 되어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게 되었고 그의 마지막은 빈의 한 빈민묘지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