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가들의 도시 파리에서는 음악가들과 시인들이 우정을 나눈 경우가 많았습니다. 음악은 선율로 문학은 언어로 자신들의 예술적 영감을 표현하는데, 그 방법이 다를 뿐 목적이 같다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음악가와 시인의 우정, 드뷔시와 말라르메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 말라르메
1880년대 파리에는 상징주의 문학에 매료된 문인들이 많았습니다. 19세기와 20세기의 경계에서 언어로 풀어내야 하는 것들에 대한 고민들로 매주 화요일 파리 로마거리 89번지에서는 '화요회'라는 모임이 이루어졌습니다. 이 모임은 시인 스테판 말라르메가 만든 모임인데, 그 시절 젊은 문인들에게 입소문이 날 만큼 매력적인 모임이었나 봅니다. 말라르메는 중학교 영어교사였는데 보를레르의 작품에 인상을 받아 시를 쓰기 시작했고, 문인들과 교류하며 매주 화요일 밤 말라르메의 아파트에 모여 자신들의 작품을 발표하고 토론하는 시간을 이어갔습니다. 말라르메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20년간 지속된 이 모임에서 20세기 초 프랑스 문단에 혜정처럼 등장한 레니에, 지드 등 많은 문인들을 배출했습니다. 이로서 프랑스 상징주의 문학 역사에서 귀중한 장소가 바로 말라르메의 아파트, 파리의 로마거리 89번지가 되었습니다.
2. 드뷔시
드뷔시는 프랑스 작은 시골마을 생제르맹랑레에서 도자기 제조업을 하는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음악 신동으로 무려 10세에 파리 국립 은악원에 입학해 12년간 학업을 수행합니다. 1884년 그는 칸타타 '방탕한 아들, L.57'로 당대 최고의 작곡가만 차지할 수 있었던 로마대상에 우승을 하게 됩니다. 추후 파리에 돌아와 본격적인 음악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혁신적이고 새로운 것을 추구한 드뷔시는 보를레르, 말라르메 뿐만 아니라 모네와 같은 화가들과 함께 동양과 러시아 등 이국 문화에도 큰 관심을 가지게 됩니다. 이러한 재료들을 작곡에 녹아내어 파리의 음악을 더욱 멋지게 만들어 갔습니다. 드뷔시는 독특한 분위기를 통해 전통에서 벗어나는 것들을 표현해 냈습니다. 가곡, 관현악곡, 발레, 음악, 피아노 작품에도 이러한 의도들을 잘 반영하였고 인상주의 양식을 확립하는데 큰 공헌을 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3. 말라르메와 드뷔시의 만남
말라르메의 화요회가 활발하던 시기 파리에는 드뷔시가 살고 있었습니다. 파리는 드뷔시가 음악가로 출세할 수 있었던 행운의 도시입니다. 드뷔시는 몽마르트 카바레에 종종 놀라갔었는데, 그곳에서 운명처럼 말라르메를 만났습니다. 30세의 드뷔시와 불혹을 넘긴 말라르메는 이렇게 음악에 대해 존경과 찬사를 주고받으며 친구가 되었습니다. 말라르메는 문인이 아닌 사람으로는 처음으로 드뷔시를 화요회 멤버에 초대했습니다. 평소 예술가들과의 만남을 좋아했던 드뷔시는 화요회에 참석하여 말라르메가 지은 116행의 장편시 '목신의 오후'를 듣게 됩니다. 여기서 들은 이 시를 바탕으로 드뷔시는 그의 마스터피스 중 하나가 되는 '목신의 오후에의 전주곡'을 작곡하게 됩니다. 이 곡은 그의 출세작이자 대표곡이 되었고 서로의 예술세계에 대해 깊은 이해가 바탕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통해 프랑스 상징주의를 빚내는 작품으로 남았습니다.